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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GENNAIO - LA GIORNATA DELLA MEM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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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ato 5 gennaio 2013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수호해주신 절세의 애국자

TELEGIORNALE DALLA COREA DEL NORD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수호해주신 절세의 애국자
남조선의 각계층과 해외동포들은 민족의 운명을 지켜주고 평화를 수호해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선군혁명실록을 가슴뜨겁게 되새기고있다.
경기도 군포시의 재야인사 리경원은 북이 제국주의련합세력과의 대결전에서 련전련승하고 강성대국의 도약대를 마련한 경이적인 현실은 선군정치가 얼마나 위력하고 리상적인 정치인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바로 김정일장군님께서 펼치신 선군정치가 있기에 우리 겨레의 운명이 수호되고 민족의 존엄이 세상에 높이 선양되였다고 말하였다.
한 퇴역장교는 내가 김정일국방위원장을 그토록 경모하는것은 강위력한 선군정치로 민족앞에 들이닥친 위기를 막고 겨레의 안녕을 지켜주신 그분의 절세의 위인상에 매혹되였기때문이라고 토로하였다.
서울의 한 로동자는 김정일장군님의 위대한 선군령도, 선군정치에 의해 우리 민족은 세계를 굽어보며 사는 존엄높은 민족으로 되였고 전쟁의 참화를 모르고있다. 지금 내외반통일세력이 정세를 전쟁접경에로 몰아가며 악랄하게 책동하고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망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남조선언론들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미국을 무릎끓게 하셨다. 미국은 봉쇄와 군사적압박으로 북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핵억제력으로 미국이 백기를 들고 회담장에 나오게 하시였다.》, 《선군정치로 민족의 자주권수호》, 《선군정치를 선택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결단은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비범한것》이라고 격찬하였다.
장일중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명예회장은 《김정일장군님의 선군정치가 조선반도의 평화를 지켜준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위대한  장군님은  필승불패의  선군정치로  세계《유일초대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국과의 대결에서 혁혁한 승리를 이룩하신 21세기 선군령장이시라고 칭송하였다.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였다.
김정일장군님의 끊임없는 선군장정으로 이북은 당당한 핵보유국으로 그 존엄과 위용을 만방에 떨칠수 있었으며 인공지구위성제작 및 발사국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였고 자위적국방력을 더욱 튼튼히 다져 미국의 북침전쟁책동을 초강경고압자세로 제압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겨레의 안녕을 굳건히 수호할수 있었다.
선군정치는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민족의 생존을 지켜주는 평화의 보검이다.
선군정치에 의해 평화가 보장되고 조국통일의 밝은 전도가 펼쳐지고있다.》
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위대한 생애와 불멸의 업적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히 빛날것이다.

궤도 기상 위성을 이끌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 북한 정부는 큰 사명을 만들었습니다

IL LANCIO DEL MISSILE CHE HA
PORTATO IN ORBITA IL SATELLITE METEO
PRODOTTO DALLA COREA DEL NORD
궤도 기상 위성을 이끌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북한 정부는 사명을 만들었습니다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 그 기백으로 새해의 진군길을 힘차게
다그쳐갈 애국충정의 분출
인공지구위성발사성공에 기여한 과학자, 기술자, 로동자, 일군들 평양 출발
당과 국가, 군대의 책임일군들과 인민군장병들, 10여만 수도시민들
수십리 연도에서 뜨겁게 환송

【평양 1월 4일발 조선중앙통신】주체조선의 우주과학기술과 종합적국력을 힘있게 과시하고 필승의 신심드높이 들어선 주체102(2013)년 새해의 첫 진군길에서 위대한 당의 두리에 굳게 뭉친 우리 군대와 인민의 혼연일체를 보여주는 화폭이 펼쳐졌다.
인공지구위성발사성공에 기여한 과학자, 기술자, 로동자, 일군들이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초청을 받고 영광과 행복의 최절정에 올라 뜻깊은 평양참관의 나날을 보내고 귀로에 올랐다.
4일 당과 국가, 군대의 책임일군들과 인민군장병들, 10여만 수도시민들이 이들을 열렬히 환송하였다.
이날 수도의 거리거리에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펼치신 강성국가건설을 위한 승리의 표대따라 폭풍쳐 내달릴 굳은 의지를 안고 또다시 우주과학의 최첨단돌파를 위한 길에 오른 위훈자들을 떠나보내는 환송열기가 굽이쳤다.
5천년민족사의 특대사변, 전인민적인 대경사를 안아온 우주정복자들이 지나게 될 평양역으로부터 영광거리, 김일성광장, 창전거리, 만수대거리, 보통문, 영웅거리, 전승광장, 4. 25문화회관, 룡흥네거리, 련못동에 이르는 수십리 연도는 명절일색으로 단장되여있었다.
연도의 곳곳에는 《평양초청행사참가자들을 열렬히 환송한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 만세!》라는 구호판들과 글발들이 세워져있었으며 공화국기, 붉은기들이 나붓기고있었다.
축하의 꽃다발들을 안고 연도에 달려나온 군중들의 가슴마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력사적인 신년사를 받아안고 신심과 희망에 넘쳐 조국의 강성부흥을 위한 새로운 투쟁에 떨쳐나선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으로 설레이고있었다.
인공지구위성발사성공에 기여한 과학자, 기술자, 로동자, 일군들이 숙소인 평양고려호텔에서 출발하였다.
호텔앞은 주체위성발사를 완전성공시켜 참된 애국은 백두산위인들의 숭고한 리상과 념원을 현실로 꽃피우는데 있다는것을 보여준 미더운 우주정복자들을 위한 뜨거운 환송열기로 차넘쳤다.
김영남동지, 최영림동지, 김기남동지, 최태복동지, 박도춘동지, 김영춘동지, 강석주동지, 김양건동지, 김영일동지, 김평해동지, 곽범기동지, 문경덕동지, 주규창동지, 로두철동지, 조연준동지와 관계부문 일군들이 호텔에서 환송하였다.
경애하는 원수님의 하늘같은 은정속에 보낸 20여일간의 평양체류의 나날 소중히 간직한 추억을 안고 떠나는 위훈자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눈물머금는 호텔종업원들, 어머니당의 사랑이 더 잘 미치도록 하기 위해 따뜻이 보살펴주며 살뜰한 정을 기울여온 봉사자들을 뜨겁게 포옹해주는 우주정복자들…
석별의 정을 뜨겁게 나누는 속에 위훈자들을 태운 뻐스행렬이 출발하자 철도성녀성취주악단이 주악하는 《불패의 강국이여 앞으로》, 《발걸음》의 노래선률이 울리는 연도에서 평천구역의 각계층 근로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열렬히 바래주었다.
최첨단수준에 올라선 우리의 우주과학기술의 위력을 만방에 과시한 위훈자들의 견인불발의 투쟁에 자기를 비추어보며 생산에서 혁신을 창조해온 김정숙평양제사공장, 평양326전선공장, 평양베아링공장 종업원들을 비롯한 근로자들은 열정의 환호를 올리고 또 올리였다.
평양역앞 연도에서 륙교1동 주민들이 꽃물결로 위훈자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군중들의 열렬한 환송의 물결을 헤가르며 뻐스행렬이 영광거리에 들어서자 환송열기는 더욱 고조되였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제일전우, 제일동지로 불러주신 우주정복의 위훈자들을 향해 두팔벌려 환호를 보내는 승리1동을 비롯한 락랑구역의 주민들, 자기도 어서 커서 우주과학자가 되겠다고 결의다지면서 발돋움을 하며 뻐스에 탄 형님, 누나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보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받들고 2012년에 첫 실용위성을 쏴올리기 위해 피타는 열정을 바쳐온 이들, 실패에도 주저를 모르고 불굴의 정신력을 분출시켜 민족사적대경사를 안아온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이기에 바래워주는 마음 그렇듯 진실하고 열렬한것이 아닌가.
평양체류의 나날 이르는 곳마다에서 축하의 꽃다발을 흔들며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환대를 해주던 시민들, 헤여지는 이 시각 연도에 달려나와 뜨겁게 전송해주는 수도 각계층 근로자들의 친혈육의 정에 우주정복자들은 눈시울을 적시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100% 국산화된 주체의 위성, 나라의 첫 과학기술위성을 쏴올린것이 너무도 대견하시여 12월의 이른새벽 흰눈덮인 머나먼 길을 달려 위성발사장을 찾으시고 특별초청을 해주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사랑속에 평양체류의 나날은 끝없는 행복속에 흘러갔다.
우주정복자들을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참된 전사, 제자들이라고 하시며 그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어버이장군님께승리의 보고를 드리시고 당중앙위원회청사에 부르시여 사랑의 기념사진을 찍어주시였으며 성대한 축하연도 거듭 마련해주신경애하는 원수님.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빛나게 관철하고 백두산대국의 무진막강한 국력을 온 세계에 과시하였다고 100여명에게 공화국영웅칭호도 안겨주시고 위훈자들모두에게 선물도 가슴한가득 안겨주신 절세위인의 크나큰 은정.
하나를 주시면 열, 백을 더 주고싶어하시는 절세위인의 사랑은 음악회, 공연관람과 릉라곱등어관, 통일거리운동쎈터, 창전해맞이식당 등의 참관일정에도 뜨겁게 어려있어 그들은 꿈같은 나날들을 보내였다.
위훈자들에게 있어서 평양참관의 나날은 다심하고 웅심깊은 어머니당의 사랑을 한껏 받아안고 일생을 두고 감회깊이 추억할 행복의 하루하루였고 선군시대 우주과학자의 영예를 가슴뿌듯이 절감한 긍지와 기쁨의 순간순간이였다.
새로운 포부를 안고 우주과학기술의 최첨단돌파전이 벌어질 초소로 떠나가는 자기들을 뜨겁게 바래워주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조국과 인민의 기대와 신뢰를 가슴후덥게 느끼며 위훈자들은 군중들에게 열정적으로 답례를 보내였다.
뻐스행렬이 환송의 꽃물결 설레이는 연도들을 지나 김일성광장을 가까이하였다.
성스러운 우리 당력사, 승리와 영광으로 빛나는 부강조국건설사와 더불어 선군조선의 위대한 혼연일체를 과시해온 광장으로 뻐스행렬이 들어서자 위훈자들의 가슴마다는 크나큰 격정에 휩싸이였다.
어버이수령님탄생 100돐경축 열병광장에서 우리모두 위대한 수령님의 후손답게, 장군님의 전사, 제자답게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힘차게 싸워나가자고 하시며 최후의 승리에로 부르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애국충정의 호소따라 유훈관철에로 줄달음쳐온 우리 군대와 인민.
우주과학의 최첨단돌파전은 어버이장군님의 위대한 애국의 신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투쟁으로 이어온 위훈의 나날이였다.
세계를 향한 지식의 탑을 높이 쌓아 인공지구위성의 궤도진입을 완전성공시킨 간고하고도 보람찬 나날들에 간직한것은 위대한장군님의 유훈을 기어이 결사관철할 불타는 충정이였고 고결한 당적량심이였으며 《조선은 결심하면 한다!》는 필승의 의지, 담력과 배짱이였다.
크나큰 믿음과 사랑으로 천백배의 힘과 용기, 애국의 열기를 북돋아주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손길아래 우리의 첫 실용위성이 우주에 날아오르는 시각을 맞이할수 있었음을 력사의 광장에 새기려는듯 위훈자들은 끝없는 긍지와 행복감에 넘쳐 군중들을 향해 손을 저어주었다.
조선인민내무군군악단이 주악하는 《위대한 내 나라》, 《돌파하라 최첨단을》의 노래선률이 군중들의 마음을 뜨겁게 울려주는 속에 김정숙평양방직공장, 림업성,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등의 일군들, 근로자들, 청년대학생들이 꽃다발을 열정적으로 흔들며 위훈자들을 맞고 보내였다.
젊고 쟁쟁한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의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그들처럼 인민들의 건강증진에 적극 기여할 열의안고 의학과학원 약학연구소 연구사들도 《성과를 바랍니다.》라고 웨치며 환송의 인사를 보내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시민들의 목소리 마디마디에서 뜨거운 진정을 느끼며 위훈자들은 열광적으로 손을 흔들면서 격정을 금치 못해하였다.
우리 인민이 사회주의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려갈 강성부흥의 찬란한 래일을 펼쳐보이는 창전거리의 인민극장과 현대적인 초고층건물들, 인민의 행복의 웃음높은 봉사시설들을 바라보며 당의 숭고한 인민사랑을 다시금 새겨안는 우주정복의 위훈자들.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모습, 시민들의 밝고 명랑한 얼굴에서 보다 높은 리상과 포부, 탐구의 열망, 애국충정의 의지를 굳게 간직하고 떠나는 그들모두의 눈가에는 래일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넘쳐흘렀다.
내 마음의 고향, 평양이여 잘 있으라! 언제나 너를 안고 살리.
당과 조국의 믿음, 인민의 기대를 깊이 간직하고 《광명성》위성들과 현대적인 운반로케트들을 더 많이 개발하여 주체조선의 종합적국력을 더 높이 떨쳐갈 결의가 우주정복자들의 가슴마다에 차넘쳤다.
자주로 존엄높고 자립으로 번영하며 자위로 굳건한 내 나라, 내 조국을 우주강국으로 더욱 훌륭히 전변시키기 위한 애국의 한길에서 빛나는 자욱을 새겨갈 위훈자들의 마음을 담아서인가 뻐스행렬은 환송의 물결을 헤가르며 기운차게 달리였다.
보통강구역과 대동강구역의 수많은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보통문을 지난 뻐스행렬이 영웅거리에 들어섰다.
연도에 줄지어 늘어선 조선인민군, 조선인민내무군 장병들이 주체위성의 성공적인 발사로 천만군민에게 크나큰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고 백두산대국의 전진을 가로막으려는 적대세력들에게 준엄한 철추를 내린 미덥고 장한 승리자들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였다.
어머니당과 온 나라 군민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안고 용기백배하여 우주과학기술의 새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격전장으로 달려가는 위훈자들의 뻐스행렬이 전승광장에 이르자 조선인민군군악단의 환영곡이 힘차게 울려퍼졌다.
최룡해동지, 현영철동지, 김격식동지, 김원홍동지, 리명수동지, 김창섭동지, 리병삼동지와 무력기관 일군들, 조선인민군, 조선인민내무군 장병들이 우주정복자들을 맞이하였다.
인민군군인들과 혁명학원학생들이 뻐스들에 올라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제일전우, 제일동지로 영광의 단상에 오른 선군조선의 영웅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열렬히 축하해주었다.
위대한 당의 위업을 총대로 담보해가는 선군혁명의 믿음직한 척후대, 억척의 지지점인 인민군대가 굳건하기에 승리의 오늘이 마련되였음을 절감하며 위훈자들은 보다 큰 위훈을 약속하였다.
인민군장병들은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유훈을 어떻게 결사관철하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분출시켜야 하는가를 실천으로 보여준 우주정복의 위훈자들처럼 선군의 총대를 억세게 틀어쥐고 주체혁명위업을 무장으로 굳건히 수호해나갈 의지를 굳게 가다듬었다.
우리 당의 강성국가건설위업을 받들어나가는 길에 언제나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진정한 전우, 영원한 혁명동지로 살며 조국이 부르는 결전의 시각이 오면 무비의 용맹을 떨쳐갈 철의 의지가 굽이치는 속에 뻐스행렬이 전승광장을 벗어났다.
비파거리와 4. 25문화회관광장에서 모란봉구역과 만경대구역의 각계층 근로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어머니당의 최상최대의 사랑을 받아안고 귀로에 오른 위훈자들을 뜨겁게 바래워주었다.
보내는 마음, 떠나는 마음이 하나가 되여 연도에 굽이치는 열정의 바다.
이는 정녕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백두산대국의 광명한 미래가 펼쳐지는 새로운 진군길에 들어선 우리 군대와 인민의 애국충정이고 혁명적기상이다.
이제 세계는 선군조선의 대지를 박차고 우주로 날아오른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처럼 강성조선의 휘황찬란한 래일을 향해 대혁신, 대비약을 창조하며 끊임없이 질풍쳐 내달리는 김일성, 김정일조선의 장엄한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룡흥네거리에서 열렬한 환송의 인사를 보내는 시민들, 그들에게 답례를 보내는 우주정복자들의 얼굴마다에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뜨겁게 어려있었다.
군중들의 환송열기는 련못동앞 도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조선인민내무군녀성취주악단이 연주하는 환영곡이 힘차게 울리는 연도에서 대성구역의 근로자들이 떨쳐나와 환송의 꽃바다를 펼치며 위훈자들을 바래워주었다.
희세의 선군령장의 두리에 굳게 뭉친 일심단결의 위력을 과시하며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길을 따라 억세게 걸어갈 신념과 의지에 넘친 군중들속에서 혁명적이며 전투적인 구호들이 힘차게 터져나와 수도의 하늘가에 울려퍼지였다.
백두산대국의 위대한 영상이신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을 주체의 태양으로 높이 모시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따라 민족의 존엄과 기상을 우주에 떨치며 힘차게 나아갈 열의에 넘친 위훈자들을 태운 뻐스행렬은 기운차게 달리였다.
한편 이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 평양참관의 나날을 보낸 과학자, 기술자, 로동계급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여 일군들, 가족, 친척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성과적인 발사에 기여한 과학자, 기술자, 로동자, 일군들에 대한 수도시민들의 열렬한 환송은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고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을 위한 투쟁을 더욱 힘차게 벌려나갈 천만군민의 철의 신념과 의지를 과시한 장엄한 화폭이였다.
 



INCONCILIABILITÀ TRA FEDE CRISTIANA E MASSONERIA [DICHIARAZIONE DELLA 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 - IL PREMIER MARIO MONTI E' AVVERTITO: NON SI PUO' ESSERE UN CATTOLICO PRATICANTE E NELLO STESSO TEMPO FAR PARTE DI POTENTI LOBBY MASSONICHE ITALIANE E INTERNAZIONALI! CHE COSA SCEGLIERA' IL PREMIER MARIO MONTI? PAPA BENEDETTO XVI° O IL GRAN MAESTRO DELLA LOGGIA?

Il 26 Novembre 1983 la 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 pubblicava una dichiarazione sulle associazioni massoniche (cfr AAS LXXVI [1984] 300).
A poco più di un anno di distanza dalla sua pubblicazione può essere utile illustrare brevemente il significato di questo documento.
Da quando la Chiesa ha iniziato a pronunciarsi nei riguardi della massoneria il suo giudizio negativo è stato ispirato da molteplici ragioni, pratiche e dottrinali. Essa non ha giudicato la massoneria responsabile soltanto di attività sovversiva nei suoi confronti, ma fin dai primi documenti pontifici in materia e in particolare nella Enciclica «Humanum Genus» di Leone XIII (20 aprile 1884), il Magistero della Chiesa ha denunciato nella Massoneria idee filosofiche e concezioni morali opposte alla dottrina cattolica. Per Leone XIII esse si riconducevano essenzialmente a un naturalismo razionalista, ispiratore dei suoi piani e delle sue attività contro la Chiesa. Nella sua Lettera al Popolo Italiano «Custodi» (8 dicembre 1892) egli scriveva: «Ricordiamoci che il cristianesimo e la massoneria sono essenzialmente inconciliabili, così che iscriversi all’una significa separarsi dall’altra».
Non si poteva pertanto tralasciare di prendere in considerazione le posizioni della Massoneria dal punto di vista dottrinale, quando negli anni 1970-1980 la S. Congregazione era in corrispondenza con alcune Conferenze Episcopali particolarmente interessate a questo problema, a motivo del dialogo intrapreso da parte di personalità cattoliche con rappresentanti di alcune logge che si dichiaravano non ostili o perfino favorevoli alla Chiesa.
Ora lo studio più approfondito ha condotto la Sacra 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 a confermarsi nella convinzione dell’inconciliabilità di fondo fra i principi della massoneria e quelli della fede cristiana.
Prescindendo pertanto dalla considerazione dell’atteggiamento pratico delle diverse logge, di ostilità o meno nei confronti della Chiesa, la Sacra 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 con la sua dichiarazione del 26.11.83, ha inteso collocarsi al livello più profondo e d’altra parte essenziale del problema: sul piano cioè dell’inconciliabilità dei principi, il che significa sul piano della fede e delle sue esigenze morali.
A partire da questo punto di vista dottrinale, in continuità del resto con la posizione tradizionale della Chiesa, come testimoniano i documenti sopra citati di Leone XIII,
derivano poi le necessarie conseguenze pratiche, che valgono per tutti quei fedeli che fossero eventualmente iscritti alla massoneria.
A proposito dell’affermazione sull’inconciliabilità dei principi tuttavia si va ora da qualche parte obiettando che essenziale della massoneria sarebbe proprio il fatto di non imporre alcun «principio», nel senso di una posizione filosofica o religiosa che sia vincolante per tutti i suoi aderenti, ma piuttosto di raccogliere insieme, al di là dei confini delle diverse religioni e visioni del mondo, uomini di buona volontà sulla base di valori umanistici comprensibili e accettabili da tutti.
La massoneria costituirebbe un elemento di coesione per tutti coloro che credono nell’Architetto dell’Universo e si sentono impegnati nei confronti di quegli orientamenti morali fondamentali che sono definiti ad esempio nel Decalogo; essa non allontanerebbe nessuno dalla sua religione, ma al contrario costituirebbe un incentivo ad aderirvi maggiormente.
In questa sede non possono essere discussi i molteplici problemi storici e filosofici che si nascondono in tali affermazioni. Che anche la Chiesa cattolica spinga nel senso di una collaborazione di tutti gli uomini di buona volontà, non è certamente necessario sottolinearlo dopo il Concilio Vaticano II. L’associarsi nella massoneria va tuttavia decisamente oltre questa legittima collaborazione e ha un significato ben più rilevante e determinante di questo.
Innanzi tutto si deve ricordare che la comunità dei «liberi muratori» e le sue obbligazioni morali si presentano come un sistema progressivo di simboli dal carattere estremamente impegnativo. La rigida disciplina dell’arcano che vi domina rafforza ulteriormente il peso dell’interazione di segni e di idee. Questo clima di segretezza comporta, oltre tutto, per gli iscritti il rischio di divenire strumento di strategie ad essi ignote.
Anche se si afferma che il relativismo non viene assunto come dogma, tuttavia si propone di fatto una concezione simbolica relativistica, e pertanto il valore relativizzante di una tale comunità morale-rituale lungi dal poter essere eliminato, risulta al contrario determinante.
In tale contesto, le diverse comunità religiose, cui appartengono i singoli membri delle Logge, non possono essere considerate se non come semplici istituzionalizzazioni di una verità più ampia e inafferrabile. Il valore di queste istituzionalizzazioni appare, quindi, inevitabilmente relativo, rispetto a questa verità più ampia, la quale si manifesta invece piuttosto nella comunità della buona volontà, cioè nella fraternità massonica.
Per un cristiano cattolico, tuttavia, non è possibile vivere la sua relazione con Dio in una duplice modalità, scindendola cioè in una forma umanitaria - sovra confessionale e in una forma interna - cristiana. Egli non può coltivare relazioni di due specie con Dio, né esprimere il suo rapporto con il Creatore attraverso forme simboliche di due specie. Ciò sarebbe qualcosa di completamente diverso da quella collaborazione, che per lui è ovvia, con tutti coloro che sono impegnati nel compimento del bene, anche se a partire da principi diversi. D’altronde un cristiano cattolico non può nello stesso tempo partecipare alla piena comunione della fraternità cristiana e, d’altra parte, guardare al suo fratello cristiano, a partire dalla prospettiva massonica, come a un «profano».
Anche quando, come già si è detto, non vi fosse un’obbligazione esplicita di professare il relativismo come dottrina, tuttavia la forza relativizzante di una tale fraternità, per la sua stessa logica intrinseca ha in sé la capacità di trasformare la struttura dell’atto di fede in modo così radicale da non essere accettabile da parte di un cristiano, «al quale cara è la sua fede» (Leone XIII).
Questo stravolgimento nella struttura fondamentale dell’atto di fede si compie, inoltre, per lo più, in modo morbido e senza essere avvertito: la salda adesione alla verità di Dio, rivelata nella Chiesa, diviene semplice appartenenza a un’istituzione, considerata come una forma espressiva particolare accanto ad altre forme espressive, più o meno altrettanto possibili e valide, dell’orientarsi dell’uomo all’eterno.
La tentazione ad andare in questa direzione è oggi tanto più forte, in quanto essa corrisponde pienamente a certe convinzioni prevalenti nella mentalità contemporanea. L’opinione che la verità non possa essere conosciuta è caratteristica tipica della nostra epoca e, nello stesso tempo, elemento essenziale della sua crisi generale.
Proprio considerando tutti questi elementi la Dichiarazione della S. Congregazione afferma che la Iscrizione alle associazioni massoniche «rimane proibita dalla Chiesa» e i fedeli che vi si iscrivono «sono in stato di peccato grave e non possono accedere alla Santa Comunione».
Con questa ultima espressione, la S. Congregazione indica ai fedeli che tale iscrizione costituisce obiettivamente un peccato grave e, precisando che gli aderenti a una associazione massonica non possono accedere alla Santa Comunione, essa vuole illuminare la coscienza dei fedeli su di una grave conseguenza che essi devono trarre dalla loro adesione a una loggia massonica.
La S. Congregazione dichiara infine che «non compete alle autorità ecclesiastiche locali di pronunciarsi sulla natura delle associazioni massoniche, con un giudizio che implichi deroga a quanto sopra stabilito». A questo proposito il testo fa anche riferimento alla Dichiarazione del 17 febbraio 1981, la quale già riservava alla Sede Apostolica ogni pronunciamento sulla natura di queste associazioni che avesse implicato deroghe alla legge canonica allora in vigore (can. 2335).
Allo stesso modo il nuovo documento, emesso dalla Sacra 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 nel novembre 1983, esprime identiche intenzioni di riserva relativamente a pronunciamenti che divergessero dal giudizio qui formulato sulla inconciliabilità dei principi della massoneria con la fede cattolica, sulla gravità dell’atto di iscriversi a una loggia e sulla conseguenza che ne deriva per l’accesso alla Santa Comunione. Questa disposizione indica che, malgrado la diversità che può sussistere fra le obbedienze massoniche, in particolare nel loro atteggiamento dichiarato verso la Chiesa, la Sede Apostolica vi riscontra alcuni principi comuni, che richiedono una medesima valutazione da parte di tutte le autorità ecclesiastiche.
Nel fare questa Dichiarazione, la Sacra 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 non ha inteso disconoscere gli sforzi compiuti da coloro che, con la debita autorizzazione di questo Dicastero, hanno cercato di stabilire un dialogo con rappresentanti della Massoneria. Ma, dal momento che vi era la possibilità che si diffondesse fra i fedeli l’errata opinione secondo cui ormai la adesione a una loggia massonica era lecita, essa ha ritenuto suo dovere far loro conoscere il pensiero autentico della Chiesa in proposito e metterli in guardia nei confronti di un’appartenenza incompatibile con la fede cattolica.

Mario Monti è un massone (ovvero come fare a pezzi il giornalismo italiano)

Continuano le pseudo - inchieste interessate sul Presidente del Consiglio e si ritorna a parlare dell'appartenenza alla massoneria del professor Monti. Salvo poi rendersi conto che in effetti...

ROMA - (ITALIA) - Eravamo tutti rimasti leggermente scioccati quando qualche giorno fa, in seguito all'investitura conferita dal Presidente della Repubblica a Mario Monti, venimmo a sapere che il neo-premier portava con sè un segreto inconfessabile. Ebbene sì, venimmo a scoprire grazie allo scoop di un noto giornale scandalistico che l'intoccabile Monti, austero e sobrio, durante gli anni del Liceo si era beccato un bel 5 in educazione fisica. Al là di qualche reazione scomposta, di qualche presa di distanza e di qualche dichiarazione imbarazzata, il mondo politico reagì alla notizia continuando ad accordare fiducia al Presidente del Consiglio. Del resto, la speranza, o meglio, la certezza era che l'influenza di una simile notizia – bomba sull'andamento dei mercati non fosse così dirompente. Andiamo avanti e cerchiamo di non accusare il colpo, questo il ragionamento che un pò tutti facevano. Placatosi il trambusto iniziale le cose sembravano avviarsi per il verso giusto.
Ora però il mondo politico deve fare i conti con una nuova e più spinosa grana per Mario Monti. La notizia, riportata sempre dallo stesso “gruppetto di soliti noti”, è di quelle che possono da sole determinare una crisi di governo: Mario Monti è un massone.
Cioè, a dirla tutta, non proprio un massone di quelli con il cappuccio in testa ed il triangolino nella mano sinistra, ma uno che in ogni caso ha avuto e continua ad avere rapporti con la massoneria. Cioè, non è che questi rapporti siano accertati, però si hanno buone ragioni per crederlo. In realtà non è che le ragioni siano poi tante, però la lettera inviata dal capo del Grande Oriente democratico a Monti sembra confermare la tesi. Vabbeh, poco importa se il Venerabile Maestro Magaldi sembra inviare lettere un pò a chiunque, Mario Monti è massone….punto e basta!
Sono certo che ci perdonerete per l'esserci lasciati andare a qualche considerazione ironica. Ma a volte, l'insistenza con la quale si cerca di “fabbricare” lo scoop non può che esser trattata con ironia. In una situazione come quella che vive il nostro Paese, piuttosto che preoccuparsi di costruire castelli di carta, un' informazione seria ed impegnata dovrebbe avere il coraggio di monitorare con costanza l'operato del Governo. E se le “indagini” di certa carta stampata fanno sorridere, non si può che ritornare estremamente seri nel commentare tutta una serie di fatti che stanno accadendo in questi giorni.
Dalla chiusura dello stabilimento di Termini Imerese alla nomina di Petruzzelli all'anti-trust, dall'intervento del Ministro del Lavoro Fornero all'assemblea della Cna al vertice italo-franco-tedesco di Strasburgo, le questioni che affollano l'agenda politica sono davvero tante. In questo contesto, più che preoccuparci di perpetrare il teatrino delle fantasticherie, dovremmo tutti prodigarci in uno sforzo comune teso a far riguadagnare alla politica quel ruolo al quale sembra aver abdicato.
Nel tempo in cui viviamo, negli anni della crisi economica più forte che il mondo ha conosciuto dal secondo dopoguerra, negli anni del decadimento sociale e politico del nostro Paese, di tutto abbiamo bisogno tranne che di una informazione che faccia avanspettacolo.

Il Professore Mario Monti è oggi ufficialmente:

- Presidente dell’Università Bocconi di Milano
- Membro Permanente del Comitato Direttivo del Club Bilderberg
- Presidente del Think Thank Bruegel
- Presidente Europeo della Commissione Trilaterale
- Consulente della Goldman Sachs


mercoledì 2 gennaio 2013

LA STORIA DELLO STATO PONTIFICIO - "DALLE ORIGINI ALL'UNITA' D'ITALIA!"

Stato Pontificio

(Elenco dei P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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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o Pontificio
Stato Pontificio – Bandiera Stato Pontificio - Ste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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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o Pontificio - Localizzazione
Dati amministrativi
Nome completo Stato Pontificio, Stato Ecclesiastico o Stato della Chiesa
Nome ufficiale Patrimonium Sancti Petri,
Status Ecclesiasticus,
Stato Pontificio
Lingue parlate de facto latino, italiano e dialetti regionali
Inno Noi vogliam Dio (sino al 1857)
Gran Marcia Trionfale (1857-1870)
Capitale Roma
Dipendente da Impero bizantino e Impero carolingio nell'Alto Medioevo, Impero francese in età Napoleonica
Dipendenze Ducato di Puglia, Calabria e Sicilia, Regno di Napoli[1], Regno d'Inghilterra, Corona d'Aragona, Regno d'Ungheria, Regno del Portogallo[2], Domini dell'Ordine Teutonico, Regno di Sardegna e Corsica, sino al 1299, quando, sotto Bonifacio VIII, l'Isola passò a Giacomo II d'Aragona.
Politica
Forma di governo Monarchia assoluta teocratica elettiva
Papa Elenco
Organi deliberativi Elenco
Nascita 752 con Stefano II
Causa Donazioni carolinge
Fine 1870 con Pio IX
Causa Presa di Roma
Territorio e popolazione
Bacino geografico Italia centrale e alcune zone dell'Italia settentrionale
Territorio originale Lazio
Massima estensione Oltre 44.000 km2 nel 1649, dopo la perdita, a cavallo fra il XV e XVI secolo, di alcune città padane cedute in feudo ai Farnese ed agli Estensi e alla successiva acquisizione, o riacquisizione, dei Ducati di Ferrara, Urbino e Castro. Tale superficie fu mantenuta fino al 1791, anno delle annessioni di Avignone e del Contado Venassino alla Francia. Nel 1859 lo Stato aveva un'estensione di 41.740 km², mentre alla vigilia dell'incorporazione al regno d'Italia (1870) non superava i 12.100 km2

Economia
Valuta Baiocco, Bolognino, Giulio, Grosso, Scudo, Lira
Commerci con Italia, Mediterraneo occidentale, Adriatico
Esportazioni vino, manufatti, grano, ferro
Importazioni armi, spezie, seta, oro, marmo, gioielli
Religione e società
Religioni preminenti Cristianesimo
Religione di Stato Cristianesimo fino al luglio 1054, poi cristianesimo cattolico
Religioni minoritarie arianesimo, ebraismo
Classi sociali clero, patrizi, cittadini, popolo
Evoluzione storica
Preceduto da Flag of PalaeologusEmperor.svg Ducato romano
Corona ferrea.png Regno longobardo
Flag of the Greek Orthodox Church.svg Esarcato d'Italia
Succeduto da Flag of Italy (1861-1946) crowned.svg Regno d'Italia
Lo Stato Pontificio, detto anche Stato della Chiesa o Stato Ecclesiastico, è il nome dell'entità statuale costituita dall'insieme dei territori su cui la Santa Sede esercitò il proprio potere temporale dal 752 al 1870.
Nella sua esistenza millenaria fu uno degli organismi politici più influenti e prestigiosi d'Europa. La proiezione internazionale dello Stato Pontificio, in epoca medievale e nei primi due secoli dell'età moderna, andò ben oltre i limiti territoriali che le circostanze storiche gli avevano assegnato. Il Regno d'Inghilterra, il Regno del Portogallo, la Corona d'Aragona, il Regno di Napoli e quello di Ungheria furono uniti alla Santa Sede da vincoli di vassallaggio e re e imperatori dovettero prostrarsi talvolta al cospetto del suo sovrano, il papa.
Lo Stato Pontificio terminò la sua esistenza nel 1870, a seguito dell'annessione dei suoi ultimi lembi di territorio, Roma e parte dell'odierna regione Lazio[3], al Regno d'Italia.

Indice

Storia medievale

Genesi dello Stato

Le origini del dominio temporale dei Papi possono essere considerate sotto due aspetti, uno di fatto e l'altro di diritto:
  • di fatto: la progressiva dissoluzione del potere bizantino in Italia centrale. Con la costituzione del ducato romano (ultimi decenni del VI secolo), la figura del Papa venne prima ad affiancarsi, poi a sostituirsi, a quella del dux di nomina imperiale. I Papi subentrarono all'esarca bizantino nei suoi poteri, ed in primis nell'esercizio della giustizia di appello, nella riscossione delle imposte, nella possibilità di imporre la fedeltà politica e l'aiuto militare ai vassalli loro sottoposti[4].
  • di diritto: le donazioni carolinge[5]. La Donazione di Sutri (728), la Promissio carisiaca (754) e la Constitutio romana (824) furono altrettante basi fondanti nella genesi dello Stato Pontificio.

Il Ducato romano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Ducato romano.
Sorto come circoscrizione politica e militare bizantina nel VI secolo, occupò, nell'ambito dell'Esarcato d'Italia, la maggior parte dell'odierno Lazio e alcune zone dell'Umbria meridionale ed aveva a capo un dux di nomina imperiale. Le sue origini non ci sono note, tuttavia viene menzionato per la prima volta da papa Gregorio Magno in una sua lettera (592)[6]. Con la nascita del Ducato romano, il vescovo di Roma iniziò ad accentrare sempre più nella sua persona le funzioni civili, oltreché religiose, del territorio, lasciando al dux un ruolo prettamente militare[7]. La debolezza della classe senatoriale, decimata dalle guerre gotiche ed emigrata in gran parte a Costantinopoli, la lontananza da Roma dell'esarca (che aveva la propria residenza a Ravenna) e, non ultimo, il prestigio personale di alcuni grandi papi (fra cui in primis Gregorio Magno), fecero sì che il pontefice divenne, di fatto, la massima autorità civile del Ducato romano, affiancandosi, e in taluni casi contrapponendosi, alla figura dell'imperatore. Da semplice proprietà privata di carattere fondiario della Chiesa (Patrimonium Sancti Petri), il territorio di cui il papa era signore fondiario diverrà nei secoli successivi un'entità statale. Ciò avvenne per effetto di alcuni decreti reali, il primo dei quali fu emanato dal re dei Longobardi.

La Donazione di Sutri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Donazione di Sutri.
Il potere civile effettivo assunto dal papato fin dall'epoca di costituzione del ducato romano, unitamente a una sempre maggiore debolezza degli imperatori bizantini in Italia, resero possibile quell'atto passato alla storia come la Donazione di Sutri (728), voluta dal re longobardo Liutprando e mediante il quale il papa acquistò per la prima volta un potere temporale formalmente riconosciuto. Al di fuori dei suoi possedimenti, la supremazia del pontefice era tuttavia ben lontana dall'essere effettiva: nei territori longobardi i vescovi locali erano pressoché indipendenti, mentre nelle terre bizantine si faceva sentire l'influenza del patriarca di Costantinopoli, vicino alla volontà dell'Imperatore (cesaropapismo).
Il re dei longobardi infatti nel 728 strappò Sutri alle milizie bizantine e papa Gregorio II chiese ed ottenne, con molto sforzo, di farselo consegnare. In realtà quei territori appartenevano giuridicamente all'Imperatore bizantino, ma il Papa, più che all'osservanza di una situazione giuridica formale, era interessato a respingere la troppo vicina potenza longobarda. Il suo timore non era infondato. Pochi anni dopo infatti, Liutprando, allo scopo di rafforzare il suo dominio sul territorio a fronte di una situazione interna molto difficile, cinse d'assedio Roma. Il Papa riuscì a farlo desistere solo grazie all'intervento (allora soltanto diplomatico) del re franco Carlo Martello (739). Di fronte a una nuova crisi con i longobardi, Zaccaria, da poco asceso al soglio pontificio, accettò accordi con Liutprando solo a fronte di ulteriori donazioni dell'ex-"ducato romano", ovvero quei territori bizantini nel centro Italia conquistati dai longobardi.
Bisanzio era debole e perdeva continuamente terreno a vantaggio dei Longobardi, mentre le sue relazioni col papato peggioravano ulteriormente. A metà dell'VIII secolo, il regno longobardo volle dare la stoccata definitiva all'esarca ravennate bizantino e colpì al cuore le terre imperiali italiane: caddero la Pentapoli e Ravenna.

Le Donazioni carolinge

Con la fine del dominio bizantino in Italia nel 751, le minacce del re dei Longobardi Astolfo nei confronti di Roma si fecero sempre più pericolose, per cui papa Stefano II si recò in Gallia per chiedere il supporto di Pipino il Breve. Nella città di Quierzy (Carisium in latino), Pipino promise al papa che, una volta recuperati i territori conquistati dai Longobardi, li avrebbe donati alla Santa Sede. Tale atto fu denominato Promissio Carisiaca. Incoronato re di Francia, Pipino inviò [8] i suoi eserciti in Italia nel 754 e nel 756. I Franchi riportarono la vittoria sui Longobardi.
In attuazione della Promissio Carisiaca l'Esarcato di Ravenna e la Pentapoli sul mare Adriatico, territori già dell'Impero bizantino nell'Italia settentrionale e centrale, ritornarono alla "Sede dell'Apostolo Pietro" [9]. Come ricompensa, Papa Stefano II conferì a Pipino la legittimazione del suo potere con la nomina per sé e per i suoi figli a patrizi romani (cioè protettori di Roma).
Il patrimonium Sancti Petri dopo la donazione di Pipino (Populonia, Ronciglione e Viterbo).
L'imperatore bizantino ovviamente protestò e inviò due messi presso il re franco, pregandolo di restituire l'Esarcato al legittimo padrone, ovvero l'Impero romano d'Oriente; ma Pipino rispose negativamente, congedando i due ambasciatori [10].
Nel 774 Carlo Magno, dopo aver sottomesso definitivamente i Longobardi che, sotto re Desiderio, avevano cercato di riconquistare le terre pontificie, sancì formalmente l'appartenenza alla Santa Sede di una lunga serie di territori. L'elenco comprende i territori già appartenuti alla Chiesa di Roma:
Includeva ex possedimenti bizantini:
E comprendeva anche territori precedentemente soggetti ai Longobardi:
Nacque così il Patrimonium Sancti Petri come stato sovrano autonomo. Quel nome fino ad allora aveva indicato i latifondi gestiti dal vescovo di Roma, in contrapposizione al patrimonium publicum gestito dai militari bizantini (duces e magister militum) e ai latifondi delle arcidiocesi di Ravenna e di Milano.
Tutte le proprietà dell'ex Esarcato d'Italia e dell'ex Pentapoli bizantina che si contrapponevano giuridicamente alle proprietà della diocesi di Roma furono così subordinate direttamente al pontefice, senza più la mediazione imperiale di Costantinopoli.
Furono esercitati invece in maniera indiretta:
  • La sicurezza militare dello Stato, che fu garantita dall'esercito dell'Impero Carolingio;
  • Il potere temporale: non avendo lo Stato Pontificio strutture amministrative, furono i membri delle aristocrazie cittadine a governare i territori della Chiesa per conto del Papa, cui riconobbero formale supremazia.
Nel 817 Ludovico il Pio, figlio e successore di Carlo Magno, emanò il pactum confirmationis o Pactum Hludovicianum, col quale confermava a Pasquale I il dominio papale sulla Pentapoli.

La Donazione di Costantino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Donazione di Costantino.
Nel 774 Carlo Magno confermò la Promissio Carisiaca di Pipino il Breve. Per rafforzare il peso dello Stato Pontificio, venne costruita la cosiddetta Donazione di Costantino al papa Silvestro I, un documento falso finalizzato a legittimare il potere temporale dei papi. Secondo tale documento, nel 321 l'imperatore romano Costantino il Grande avrebbe assicurato a Silvestro I e ai suoi successori il dominio esclusivo sul Palazzo del Laterano e la città di Roma, con tutte le pertinenze e le insegne imperiali. A scoprire che il documento era un falso fu l'umanista Lorenzo Valla nel 1440 circa. Valla constatò che il latino in cui era stato scritto aveva caratteristiche diverse dalla lingua dell'Impero romano.

Tra impero carolingio e aristocrazia romana

Nell'anno 824, la sovranità papale sullo Stato della Chiesa e gli stretti vincoli che legavano tale entità politico-territoriale all'Impero furono ribaditi e rafforzati mediante la Constitutio romana, emanata dall'imperatore carolingio Lotario I nel corso di un suo soggiorno a Roma. Con la Constitutio romana, l'imperatore ebbe riconosciuto il suo status di supremazia sull'autorità papale. Il trattato comportava, infatti, l'obbligo per il papa neoeletto di giurare fedeltà all'imperatore, mentre questi si riservava il diritto di intervento nell'elezione pontificia e diritti di sorveglianza, anche militare, sulla città di Roma.
Con lo smembramento dell'impero carolingio, cadde in disuso anche la Constitutio. Finì quindi il periodo di vassallaggio del papa verso l'imperatore, ma gli anni successivi non furono migliori. La Santa Sede cadde in balia dell'aristocrazia romana, che tentò di sottrarre al pontefice il potere temporale (amministrazione della giustizia, governo della città di Roma). Tale situazione si protrasse per tutto il X secolo.
Un tentativo di uscire da tale difficile situazione fu effettuato da papa Giovanni XII, che nel 960 chiese al re di Germania Ottone I di Sassonia di imporre la propria autorità, come sovrano della maggiore potenza temporale della cristianità, al popolo e all'aristocrazia romani. Ottone I scese in Italia (settembre 961) e fu incoronato imperatore dallo stesso Giovanni XII (2 febbraio 962). I due sovrani ripristinarono di comune accordo la Constitutio romana e stipularono un nuovo patto, il Privilegium Othonis, con il quale l'imperatore prometteva di restituire al pontefice quei territori che gli imperatori carolingi gli avevano donato e poi i Re d'Italia gli avevano sottratto. Ma con il pretesto della sacra defensio ecclesiae, il Privilegium consentiva anche la diretta intromissione dell'Imperatore negli affari del patrimonium S. Petri e riaffermava la sovranità dell'impero sullo Stato della Chiesa. Il Privilegium fu riconfermato con il Diploma Heinricianum, stipulato il giorno di Pasqua del 1020 tra papa Benedetto VIII (1012–1024) ed Enrico II del Sacro Romano Impero (1002–1024).

Lo Stato della Chiesa nel Basso Medioevo

Con Innocenzo III (1198-1216) ebbe inizio la politica di "ricuperazione" del Patrimonio di San Pietro da parte del papato.
Nel primo millennio della storia cristiana la potestas spirituale era riconosciuta, oltre che al papa, a tutti i vescovi; inoltre gli esponenti dell'episcopato erano di fatto i detentori del potere secolare nei territori da loro amministrati. Lo dimostra l'importanza rivestita tra XI e XII secolo dalla cosiddetta «lotta per le investiture», ovvero il conflitto per il controllo delle sedi ecclesiastiche, ritenute essenziali per il controllo dei territori e l'esercizio della giurisdizione. Nello stesso Stato Pontificio, l'effettivo potere dei papi, infatti, era rimasto circoscritto al solo territorio dell'antico Ducato romano.
Nel corso dei secoli XII e XIII, invece, si realizza un processo di accentramento che si conclude con l'attribuzione al solo pontefice della plenitudo potestatis (pienezza del potere). L'azione di riforma ebbe come protagonista Gregorio VII (Dictatus papae, 1075), il quale concepì ed implementò la nuova struttura, accentrata, della Chiesa, che comportava la dipendenza da Roma di tutti i vescovi. Il modello era l'ordine celeste: come Cristo è origine di ogni potestas in quanto Dio e al tempo stesso titolare di essa in quanto uomo, così il suo vicario in Terra esercita una piena potestà, sia spirituale che secolare. I due poteri rimangono concettualmente distinti, ma sono riuniti entrambi nella persona del pontefice. Il quale può delegare l'esercizio del potere secolare all'imperatore (potestas indirecta) e ai re, attraverso la loro legittimazione con la cerimonia dell'incoronazione, salvo revocare la delega e rientrare in possesso dei pieni poteri in seguito a comportamenti in contrasto con il Magistero della Chiesa (potestas directa)[12].
Con Innocenzo III (1198-1216) lo Stato Pontificio iniziò ad uscire dall'ambito romano per assumere una nuova fisionomia, interregionale. Il suo pontificato fu caratterizzato dalle ricuperazioni del Patrimonio di San Pietro. Nelle terre recuperate, Innocenzo III assegnò i poteri di governo a un esponente di una dinastia feudale. Il Papato e l'Impero, usciti da pochi decenni dalla lunga lotta per le investiture, non avevano ancora definito completamente a livello politico e territoriale i rispettivi poteri. Non era chiaro quali fossero i territori sottoposti al dominio temporale della Santa Sede. L'imperatore Federico I Barbarossa aveva fatto atto di sottomissione al potere della Chiesa dopo la sconfitta nella battaglia di Legnano (1176), e si era impegnato a restituire al Papa universa regalia et alias possessiones Sancti Petri, che i suoi predecessori avevano sottratto negli anni precedenti. Ma tale atto era rimasto sulla carta.
Il 12 luglio 1213 l'imperatore Ottone IV confermò le "promesse" di restituzione dei territori; nel 1219 Federico II di Svevia, in procinto di essere incoronato imperatore, rinnovò la cessione di parte dell'Italia settentrionale al papa. Lo scontro con l'autorità imperiale in Italia si protrasse nel XIII secolo, quando i liberi comuni e la nuova borghesia cittadina acquisirono un potere economico sempre maggiore e iniziarono ad aspirare ad una maggiore libertà politica. Lo Stato della Chiesa sostenne la lotta dei comuni contro Federico I e Federico II di Svevia al fine di indebolire l'autorità politica dei sovrani romano-germanici. Innocenzo III si pose l'obiettivo di rendere effettivo uno Stato di diritto che fino ad allora era stato riconosciuto dagli imperatori soltanto a parole. A sostegno della propria azione, il pontefice enunciò la teoria del Sole e della Luna. Secondo tale visione, il papa, depositario della luce di Dio, sarebbe stato superiore all'imperatore, detentore di un potere umano, poiché i poteri mondani originavano unicamente da Dio. L'imperatore, quindi, avrebbe dovuto brillare semplicemente di luce riflessa[13].
Papa Onorio III proseguì la politica territoriale di Innocenzo III. Ma nel 1230 l'esperimento, iniziato ventotto anni prima dal suo predecessore, fu concluso senza successo. Gregorio IX pertanto decise di inviare funzionari ecclesiastici, i rettori, che risiedessero permanentemente nella provincia e la governassero (o meglio rappresentassero il governo centrale) per un certo numero di anni[14]. Nel 1244 Innocenzo IV nominò il cardinale Rainer suo rappresentante in tutto lo Stato della Chiesa.
Nel 1248 l'opera di riconquista dei territori del nord poté dirsi conclusa, grazie all'azione dell'esercito guelfo guidato da Ottaviano degli Ubaldini (maggio-giugno 1248). Negli anni seguenti, però, le forze, ghibelline ripristinarono il controllo sulle città romagnole. Il lungo interregno che seguì la morte di Federico II (dal 1250 al 1273), creò in Italia uno stato di incertezza e precarietà. Invece che favorire la Santa Sede, ne limitò l'azione. I territori nella pianura padana ritornarono sotto il governo pontificio con papa Niccolò III. Nel 1274 il pontefice assegnò a Rodolfo, principe della Casa d'Asburgo, il diritto di cingersi della corona di re dei Romani. Lo invitò quindi a venire in Italia per essere incoronato [15]. Rodolfo promise, sotto pena di scomunica, di scendere in Italia entro una certa data. Ma mancò la promessa, essendo scoppiata una guerra in Germania. Scaduta la data concordata, al papa non rimase che scomunicarlo. Per riconciliarsi con la Chiesa ed essere incoronato, accettò di cedere la Contea di Romagna e la città di Bologna alla Santa Sede. Il passaggio formale dei poteri fu sancito il 29 maggio 1278. Con l'annessione della Romagna e di Bologna, lo Stato Pontificio diventò lo stato italiano più esteso dopo il Regno di Sicilia.
Nel 1302 Bonifacio VIII promulgò la bolla Unam Sanctam Ecclesiam, in cui riaffermò la supremazia del potere spirituale sul potere temporale. Dopo Benedetto XI (morto nel 1304) la Santa Sede iniziò a subire l'influenza politica della componente francese. I transalpini fecero trasferire la sede pontificia ad Avignone e monopolizzarono per lungo tempo i conclavi, facendo eleggere solo pontefici francesi. Fu il periodo detto della Cattività Avignonese[16]. Lo Stato Pontificio, a causa della lontananza della sede papale, cadde in preda all'anarchia e fu dilaniato dalle lotte interne delle principali famiglie nobiliari romane (come quelle tra i Colonna e gli Orsini, narrata anche da Boccaccio).

La ricostituzione dello Stato dopo Avignone

Urbano VI
Durante la cattività avignonese il papato perse il controllo di gran parte dei propri territori. Lo Stato Pontificio si frazionò in una serie di potentati locali. Nel 1353 Innocenzo VI, anche in previsione del possibile ritorno del papato nella sede di Roma, incaricò il cardinale Albornoz di restaurare l'autorità papale nei territori della Chiesa in Italia. Con la Bolla del 30 giugno 1353 gli furono conferiti poteri straordinari (vicario generale terrarum et provinciarum Romane Ecclesie in Italiane partibus citra Regnum Siciliae). L'Albornoz riuscì nell'impresa in parte con la diplomazia, in parte con le armi. Il cardinale intraprese una serie di campagne che sottomisero il Lazio, Spoleto, i Montefeltro di Urbino, i Malatesta di Rimini e gli Ordelaffi di Forlì. Quest'ultima fu piegata solo quando papa Innocenzo VI proclamò una crociata contro i Forlivesi. La Crociata durò dal 1355-56 fino al 1359, quando si giunse ad un compromesso: Forlì ritornava alle dirette dipendenze pontificie. Forlimpopoli e Castrocaro rimanevano all'Ordelaffi, che le governava a titolo di vicario papale. Al termine della campagna, l'Albornoz si insediò a Forlì, dimostrando, anche simbolicamente, che le operazioni per riaffermare l'autorità pontificia sui territori della Chiesa si erano positivamente concluse. Al Nord, solo Bologna, almeno fino all'epoca di papa Giulio II, rimase indipendente. Il recupero dei possedimenti nelle Marche e nella pianura padana fu fondamentale poiché gran parte del reddito che alimentava le finanze papali proveniva da questi territori. Solo con la ricostituzione di tali possedimenti sarebbe stato possibile il ritorno del papato a Roma[17].
Una volta ricostituita l'unità dello Stato della Chiesa, il cardinale Albornoz creò un'amministrazione basata sul decentramento provinciale, codificata nel 1357 nelle cosiddette Costituzioni egidiane[18]. Il modello organizzativo introdotto da Albornoz fu successivamente ripreso e adottato dagli altri Stati italiani. Lo stato risultava suddiviso nelle seguenti province:
La suprema autorità di ogni singola provincia è il Rettore, il quale opera con pieni poteri in nome del pontefice. Le province sono rette da Legati, finanziariamente autosufficienti e coordinate da Roma. La fisionomia territoriale delle diverse Province rimarrà incerta a lungo. Solo con papa Pio IV si avrà una certa e determinata individuazione di ciascuna provincia.
Nel 1367 Urbano V fece ingresso in città, ma ci rimase solo tre anni, poiché nel 1370 fece ritorno ad Avignone, dove morì. Ma questi erano solo i prodromi della svolta: nel 1378, morto Gregorio XI, i cardinali riuniti in conclave, sotto le pressioni insistenti dei romani, elessero papa Urbano VI, un italiano che, a differenza dei suoi predecessori, restò in città.
I francesi, non volendo perdere il proprio controllo sul pontefice, dichiararono l'elezione nulla appigliandosi alle pressioni esercitate dalla folla sui cardinali. Poi, riuniti tutti i propri cardinali, elessero un antipapa, Clemente VII. Fu l'inizio del grande Scisma d'Occidente.
In questo periodo, l'Europa si spaccò in due e l'autorità del papato romano diminuì sensibilmente. Si sviluppò, così, un forte interesse per le terre dello Stato Pontificio, una base di potere sicura. Il Quattrocento, perciò, iniziò all'insegna di una forte espansione delle terre papali nell'Italia centrale che continuò anche ben oltre la fine dello scisma.
La frattura della cristianità si ricucì molto difficilmente: i due papi in carica rifiutavano di dimettersi e neppure il concilio di Pisa, che si riproponeva di dichiarare deposti i pontefici per eleggerne un terzo, riuscì a produrre qualche progresso. Alla fine il concilio di Costanza fece dimettere i papi di Pisa e di Avignone e tutti quegli altri autonominati pontefici che, approfittando del disordine generale, avevano cercato, con l'appoggio di numerosi stati, di impossessarsi del soglio di Pietro.

Storia moderna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Suddivisioni amministrative dello Stato Pontificio in età moderna.

Il Cinquecento e Seicento

Negli ultimi anni del XV secolo, la politica dello Stato Pontificio si orientò sempre più nettamente verso la cura dei propri possedimenti in Italia settentrionale, dando l'avvio, sotto il pontificato di Alessandro VI (1492-1503) a una serie di campagne militari atte soprattutto a sottomettere le città romagnole. Ai primi del Cinquecento Giulio II completò la riconquista dei territori settentrionali dello Stato. Bologna venne ripresa nel 1506, Ravenna pochi anni dopo.
Lo Stato Pontificio aveva ereditato dal Medioevo la tradizionale divisione territoriale il cinque Province. La fisionomia politica e territoriale delle diverse Province rimase incerta a lungo. Solo con papa Paolo III (1534-1549) la Provincia conosce una prima e completa sistemazione giuridico-amministrativa, con la raccolta di leggi e decreti (Constitutiones) promulgata da monsignor Gregorio Magalotti nel 1536. Si prescrissero i compiti del presidente e dei suoi ufficiali, quelli dei governatori delle singole città. Il governatore locale fu il principale ministro della Legazione sul territorio.
Con il pontificato di Pio IV (1559-1565) si ebbe una certa e determinata suddivisione territoriale e la fine del grande nepotismo. Rafforzata al proprio interno, per circa un secolo la Santa Sede si impose come uno dei grandi protagonisti della politica italiana del tempo. A partire dal pontificato di Paolo III lo Stato della Chiesa si estese e consolidò notevolmente, raggiungendo attorno alla metà del secolo successivo la sua massima estensione.
Fra le Signorie e gli Stati passati da una condizione di blando vassallaggio (ma in realtà semi-indipendenti) a un vero e proprio assorbimento all'interno dello Stato Pontificio vi furono, fra il Cinquecento e Seicento, Perugia (1540), Ducato di Ferrara (1598), Ducato di Urbino (1631) e i rispettivi territori da esse dominati. Ultimo a cadere fu il Ducato di Castro (1649), vero e proprio Stato nello Stato, costituitosi in epoca di Paolo III.
Il governo paternalista della Chiesa, se da un lato operò per lenire, soprattutto nella generale crisi che colpì il mondo mediterraneo e centroeuropeo, a partire dal 1620 circa[21], le sofferenze delle classi più umili attraverso la creazione di una serie di istituzioni benefiche (fra cui i primi Monti di Pietà apparsi in Europa, ospedali pubblici, mense per poveri, ecc.), dall'altro non riuscì a rinnovarsi e modernizzarsi in forma soddisfacente allorquando si ebbe, nella prima metà del Settecento, in Italia e in altri paesi, una generale ripresa economica e culturale. Fino almeno allo scoppio della Rivoluzione francese (1789), lo Stato Pontificio godé tuttavia di un moderato consenso popolare e di un fermo appoggio da parte delle sue classi dirigenti, grazie anche al sostegno di una borghesia di estrazione non mercantile, legata all'apparato burocratico dello Stato, e a quello della nobiltà locale, ricompensata con feudi, prebende e, in alcuni casi, anche con l'ascesa al soglio pontificio di alcuni fra i suoi rappresentanti più influenti.
Come si è già avuto modo di segnalare, nel Trecento e nel Quattrocento la Cattività avignonese e il Grande Scisma avevano indebolito il papato, che aveva iniziato a perdere parte della propria influenza sulla politica europea, pur non avendo ancora definitivamente rinunciato alla propria missione di guida della Cristianità. La nascita e la diffusione della Riforma protestante nella prima metà del XVI secolo, sembrò compromettere per sempre la missione universale del Cattolicesimo in Europa e nel Mondo. Nuovo vigore venne tuttavia dato alla Chiesa e al proprio Stato con il Concilio di Trento e il fermo appoggio prestato al Papato dagli Asburgo di Spagna e d'Austria, allora all'apice della propria potenza. I rapporti con la Spagna furono vantaggiosi per la Chiesa, ma conobbero anche momenti negativi. La Spagna, potenza egemone in Italia dopo la battaglia di Pavia (1525), se da una parte schiacciò con estremo rigore ogni opposizione papale alla propria politica di potenza nella penisola (sacco di Roma, 1527) dall'altra ne puntellò il potere sia in funzione antiveneziana, sia come baluardo del cattolicesimo e della stessa monarchia asburgica.
La decadenza dell'Impero ispanico, già chiaramente percepibile attorno all'inizio degli anni quaranta del XVII secolo e sancita definitivamente con la Pace di Vestfalia, si ripercosse negativamente sullo Stato della Chiesa, costretto a patteggiare da posizioni di debolezza con la nuova potenza emergente europea: la Francia di Luigi XIV.

Riforme del XVIII secolo

Nella prima metà del Settecento si ebbe, in Italia e in altri paesi, una generale ripresa economica e culturale. Alcuni papi avviarono una serie di riforme, sia sociali che economiche. I primi tentativi, volti a migliorare la condizioni di vita dei sudditi e a rilanciare l'economia, ebbero però esito negativo. Clemente XI istituì nel 1701 una «Congregazione del sollievo», che mise a punto un programma economico e sociale che prevedeva il frazionamento dei latifondi, l'istruzione agraria, il miglioramento delle condizioni igieniche dei lavoratori, l'organizzazione del credito agrario, il miglioramento delle comunicazioni e del commercio. I proprietari terrieri si opposero fermamente alle riforme e il piano naufragò. Nel 1715 il pontefice sciolse la Congregazione.
Fu portata termine con esito positivo, invece, la nuova ripartizione del territorio dello Stato. La riforma comportò la creazione di nuove province e la riorganizzazione delle varie circoscrizioni su basi territoriali più omogenee. Si voleva in tal modo effettuare un controllo più capillare sul territorio ed attenuare gli effetti negativi dei tanti privilegi (sia aristocratici che comunali) che impedivano il corretto funzionamento della macchina statale.
La nuova e più articolata ripartizione provinciale prevedeva:
Nella seconda metà del secolo iniziò una nuova stagione riformatrice in campo economico. Papa Pio VI (1775-1799), mise mano a un programma di riassetto delle finanze che si concretizzò nella semplificazione delle imposte e nella creazione di un catasto (1777). Inoltre cercò di rendere più efficace il controllo fiscale sulle Legazioni istituendo una Camera di conti in ciascuna di esse. Nel 1786 il pontefice eliminò le dogane interne (rimasero in attività solamente quelle dei centri più importanti: Bologna, Ferrara, Benevento e Avignone); rafforzando nel contempo il controllo sulle merci in circolazione nello Stato, con l'istituzione di ottanta nuovi uffici di frontiera. Infine il pontefice promosse la bonifica delle paludi pontine. Secondo i suoi intenti, la bonifica avrebbe permesso l'avvio di nuove coltivazioni, con un effetto benefico sull'occupazione e sulla produzione, ma le nuove terre finirono in mano ai grandi proprietari assenteisti, che fecero fallire il progetto.

La parentesi napoleonica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Pio VII e Napoleone.
La Repubblica romana sostituisce lo Stato Pontificio (1799)
Lo Stato della Chiesa (in inglese Papal States) e gli stati vicini in epoca napoleonica (1806)
L'invasione napoleonica sconvolse gli equilibri settecenteschi italiani e lo Stato Pontificio rischiò di scomparire definitivamente. Nel 1797, con il trattato di Tolentino, Napoleone fece riconoscere da Papa Pio VI la cessione alla Francia di Avignone e del Contado Venassino (già occupati alcuni anni prima in età rivoluzionaria) e, alla Repubblica Cisalpina, l'annessione di Bologna, Ferrara e la Romagna. Nel febbraio 1798 venne proclamata l'effimera Repubblica, storicamente conosciuta come Repubblica Romana, strettamente legata alla Francia. Per la seconda volta in meno di cinque secoli[22] Roma non era più capitale dello Stato della Chiesa. Papa Pio VI fu arrestato e esiliato; morì prigioniero in Francia. Dopo alterne vicende, la Repubblica romana cadde definitivamente nel settembre 1799, con l'occupazione di Roma da parte dell'esercito borbonico (che già si era impossessato della città per alcuni giorni nel novembre-dicembre del 1798). Sotto la protezione del Regno di Napoli e dell'Impero austriaco fu ripristinato il potere temporale del Pontefice.
Il nuovo papa, Pio VII, amministrò lo Stato Pontificio finché nel 1808 l'Italia fu nuovamente invasa dall'esercito francese. In quello stesso anno la parte settentrionale delle Marche fu devoluta allo Stato satellite napoleonico del Regno italico. Anche Pio VII venne arrestato e deportato, la sua prigionia in Francia si protrasse per alcuni anni (1808-1814). Dopo la caduta di Napoleone a Lipsia (battaglia di Lipsia), i territori occupati dai francesi furono restituiti alla Santa Sede (24 gennaio 1814). Lo Stato Pontificio perse solamente le exclavi francesi.

Età contemporanea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Governo (Stato Pontificio).

La Restaurazione

Ritornato nella pienezza dei suoi poteri, papa Pio VII elaborò una nuova suddivisione amministrativa dello Stato Pontificio tramite il motu proprio «Quando per ammirabile disposizione»[23] del 6 luglio 1816, che prevedeva l'istituzione delle seguenti province (tra parentesi il capoluogo), distinte in legazioni e delegazioni:
Fin dall'epoca della Rivoluzione francese erano andate diffondendosi, nelle fasce sociali più colte e progressiste della popolazione, idee liberali, che trovarono ulteriore alimento e diffusione, nel corso dei decenni successivi, all'epoca della Repubblica romana e in età napoleonica. Durante la Restaurazione, l'insofferenza nei confronti del governo pontificio diede vita a società segrete che si diffusero rapidamente, ricevendo stimoli sia dalle organizzazioni di ispirazione buonarrotiana, sia dalla Carboneria.[24] Se i moti del 1820-1821 diedero luogo a un inasprimento delle contromisure reazionarie in tutti gli Stati italiani, negli Stati della Chiesa (e nel Regno delle Due Sicilie) tali contromisure non furono forse neppure percepite dal momento che la repressione era una costante nei metodi governativi pontifici.[25] Il malessere assunse all'epoca, in alcuni territori pontifici, forme di aperta ribellione domata talvolta da bande armate di sanfedisti: in Romagna, alcuni anni più tardi, acquistò una triste notorietà il capobanda ed avventuriero Virginio Alpi, che operava nelle zone comprese tra Forlì e Faenza[26].

Il pontificato di Pio IX

Nei primi anni di pontificato, Pio IX governò il Paese con una progressiva apertura alle richieste liberali della popolazione. Iniziò una stagione di grandi riforme: la Consulta di Stato; la libertà di stampa e la libertà agli Ebrei; la Guardia Civica; l'inizio delle ferrovie, fra cui anche la progettazione della linea Bologna-Ancona, il cui primo tronco, Bologna-Forlì, fu aperto il 1º settembre 1861; la costituzione del Municipio di Roma; il primo governo con una componente laica, guidato dal cardinale Giuseppe Bofondi, noto in quanto non avverso alle idee liberali. Proprio Bofondi, però, si trovò a dover negare l'appoggio del Governo Pontificio al nuovo regime costituzionale del Regno delle Due Sicilie[27].
Il pontefice promosse inoltre la costituzione di una Lega doganale tra gli Stati italiani, che rappresentò il più importante tentativo politico-diplomatico dell'epoca volto a realizzare l'unità d'Italia per vie federali.
Il 14 marzo del 1848 Pio IX deliberò l'atto politico più importante: con l'editto Nelle istituzioni concesse la costituzione, denominata «Statuto fondamentale pel Governo temporale degli Stati di S. Chiesa». Lo Statuto istituiva due Camere legislative ed apriva le istituzioni (sia legislative che esecutive) ai laici.
Nello stesso periodo «...l'azione governativa [rimase]...del tutto estranea a ogni istanza di progresso posta dallo sviluppo economico europeo...».[28] Neanche la Repubblica romana (1849) seppe avviare una vera stagione di riforme. Il deficit dello Stato Pontificio era nel periodo pre-unitario uno dei più alti tra gli Stati della penisola: circa il 20% in più rispetto al Regno di Sardegna, più del 200% in più rispetto al Ducato di Parma e circa il 330% in più del Ducato di Modena.[29]
Successivamente Pio IX avviò alcune riforme per favorire lo sviluppo dello Stato.[30]
Fra le principali opere pubbliche iniziate o portate a compimento nello Stato Pontificio alla metà dell'Ottocento furono:
  • prosciugamento delle paludi di Ferrara e di Ostia;
  • ampliamento dei porti di Ravenna, Cesenatico, Senigallia e Ancona;
  • realizzazione di una rete ferroviaria. Il primo collegamento fu Roma-Frascati, inaugurato il 14 luglio 1856. Seguirono l'Ancona-Falconara (1861)[31], la Roma-Civitavecchia (1859), la Roma-Orte (1865) e la Orte-Falconara (1866). Per quanto riguarda i collegamenti con il Regno di Napoli, nel 1862 fu completato il collegamento con Ceprano, nel frusinate[32]. Tale rete risultò tuttavia essere inadeguata, così come lo fu la rete stradale costruita nei decenni che precedettero l'annessione all'Italia. Secondo fonti di alto profilo vi fu, all'epoca, uno «... scarso interesse governativo per la rete stradale e l'avversione verso le ferrovie... ».[28]
Nei due decenni che precedettero l'annessione dello Stato Pontificio al Regno d'Italia, furono in massima parte completati i lavori di bonifica dell'Agro romano e iniziati quelli relativi alla rete idrica per il soddisfacimento del fabbisogno di acqua potabile degli abitanti di Roma che tuttavia vennero portati a compimento solo dopo l'unione della città allo Stato italiano.

La fine del potere temporale

I principali difensori dello Stato della Chiesa erano stati la dinastia dei Savoia, la dinastia dei Borbone e l'Impero austriaco. Ma dalla metà degli anni cinquanta la politica dei Savoia, con il Regno di Sardegna mostrò una netta virata in senso anticlericale. Il 29 maggio 1855 il Parlamento di Torino approvò una legge che sopprimeva gli ordini religiosi ed ordinava l'incameramento e la vendita di tutti i loro beni. Il re Vittorio Emanuele controfirmò, sancendo così la sua rottura con la Chiesa. Non era mai successo prima che la dinastia Savoia si fosse messa frontalmente contro la Santa Sede. Il papa condannò fermamente la legge con l'allocuzione Cum saepe.
L'anno seguente, in aprile, lo Stato Pontificio subì un duro attacco diplomatico dal primo ministro di casa Savoia, Camillo Cavour. Il Regno di Sardegna aveva partecipato alla Guerra di Crimea come alleata delle potenze europee occidentali. Vinta la guerra, poté sedersi al congresso di Parigi a fianco di Francia e Inghilterra. Cavour pronunciò un discorso che conteneva un attacco ben calcolato allo Stato Pontificio. Il conte affermò infatti: “Gli stati della Santa Sede non furono felici che sotto Napoleone I”[33].
La Santa Sede capì che il piano di Cavour fosse la conquista di Roma solo nel 1859, quando la Legazione delle Romagne fu invasa da due battaglioni di truppe piemontesi senza che l'atto fosse stato anticipato da una dichiarazione di guerra. Si configurò una situazione di stallo, che si protrasse per tutto il resto dell'anno: la conquista era fatta ma non aveva base legale. All'inizio del 1860 il governo di Torino chiese al Papa di rinunciare volontariamente alle Legazioni; ottenendo un netto rifiuto, furono organizzati dei plebisciti di annessione.
L'11-12 marzo si tennero le consultazioni nei territori delle ex Legazioni e in Toscana. Alle nuove province fu immediatamente applicata la legge sarda, che comprendeva la soppressione degli ordini religiosi e l'incameramento dei loro beni.
Il prossimo obiettivo del Regno di Sardegna fu la conquista di Marche ed Umbria. La Santa Sede, non disponendo di un esercito regolare, lanciò una chiamata alle armi per raccogliere volontari da tutta Europa. Fu costituito un esercito multinazionale (italiani, austriaci, olandesi, polacchi, belgi, svizzeri e irlandesi) di circa quindicimila uomini, sotto la guida del generale francese Christophe de Lamoricière che andarono, in seguito, a formare il reggimento degli Zuavi pontifici.
L'esercito piemontese, guidato dal generale Enrico Cialdini, attaccò l'11 settembre e vinse il confronto dopo solo una settimana. La battaglia decisiva fu combattuta il 18 settembre a Castelfidardo, nell'Anconetano. Nel giro di un mese si svolsero i plebisciti di annessione.
Perse Marche ed Umbria, lo Stato Pontificio fu ridotto al Lazio. Il 25 marzo 1861, pochi giorni dopo la proclamazione del nuovo Regno d'Italia, Cavour annunciò alla Camera dei Deputati che «Roma sola deve essere capitale d'Italia»[33].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Questione romana.
Roma era protetta, per antichissima tradizione, dal re di Francia (in quest'epoca l'imperatore Napoleone III). Ma Napoleone III era, al contempo, il principale alleato e protettore del neonato Regno d'Italia. Il 15 settembre 1864 la Francia e l'Italia stipularono una convenzione con la quale il Regno d'Italia si impegnò a non attaccare i territori della Santa Sede, mentre la Francia ritirò le sue truppe dai territori papali[34]. Subito Giuseppe Garibaldi tentò una marcia su Roma partendo dalla Sicilia. Ma, non avendo chiesto il consenso a Parigi, la sua azione fu bloccata, ad opera dell'esercito italiano, quando i volontari erano da poco sbarcati in Calabria[35] (29 agosto 1862).
Garibaldi ritentò l'attacco a Roma nel 1867, a fine settembre con un esercito di volontari attaccò il Lazio da nord. Fu fermato e sconfitto a Mentana il 3 novembre 1867 da una forza costituita da soldati pontifici e il corpo di spedizione francese.
Nel 1868 Pio IX convocò un concilio ecumenico. I lavori del Concilio Vaticano I iniziarono l'8 dicembre 1869; il risultato più importante fu l'affermazione del dogma dell'infallibilità del magistero del Papa in materia di fede e di morale (quando tale magistero rispettasse alcune condizioni). Lo scoppio della Guerra franco-prussiana (19 luglio 1870) interruppe i lavori[36]. Il 1º settembre 1870 la Francia venne sconfitta dalla Prussia, e le venne a mancare la forza militare per continuare a proteggere il potere temporale del Papa. Vittorio Emanuele II ne approfittò per attaccare Roma. Il 20 settembre avvenne la presa di Roma da parte dei bersaglieri del re. Il Regno d'Italia realizzò l'annessione del Lazio: liberazione secondo l'ottica italiana, usurpazione secondo quella pontificia.
Nel 1867 il Parlamento del Regno aveva promulgato una legge che prevedeva l'incameramento dei beni mobili e immobili di conventi e monasteri su tutto il territorio, e comprendeva anche il divieto per tutti i cittadini italiani di pronunciare voti. Il 13 maggio 1871 il Parlamento emanò una nuova legge che elencava i diritti della Santa Sede all'interno del Regno d'Italia. Passata alla storia come «legge delle Guarentigie», essa riconosceva il papa come sovrano indipendente, con il possesso (ma non la proprietà) dei palazzi e giardini vaticani, dei palazzi del Laterano, della cancelleria a Roma, e della villa di Castel Gandolfo. Stabiliva inoltre che il governo italiano non sarebbe intervenuto nella nomina dei vescovi. Pio IX non accettò la legge, ne scomunicò gli autori e si considerò prigioniero in Vaticano.
Solo il 20 settembre 1900 il papa Leone XIII proclamò la dissoluzione ufficiale dello Stato Pontificio.
Il primo accordo ufficiale tra la Chiesa e lo Stato italiano fu siglato nel 1929, quando con la firma dei Patti Lateranensi venne creata lo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 che restituì una minima sovranità territoriale alla Santa Sede. Tale sovranità potrebbe dar luogo a considerare la Città del Vaticano come un vero e proprio stato successore (o fra gli stati successori, insieme al Regno d'Italia) dell'antico Stato Pontificio. Il tema divide tuttora gli storici e continua ad essere oggetto di dibattito.

Esercito dello Stato Pontificio

Exquisite-kfind.png Per approfondire, vedi la voce Esercito dello Stato della Chiesa.

Religione

Lo Stato Pontificio, per la sua particolare conformazione di entità statale e religiosa, ha da sempre rappresentato uno dei capisaldi della chiesa cristiano cattolica in occidente. Il cattolicesimo era dichiarato per costituzione religione di stato e solo la sua professione di fede dava pieno godimento di tutti i diritti statali.
Fino a tutta la prima metà del XVI secolo vi erano tuttavia numerose comunità ebraiche sparse per lo Stato, fra cui si segnalavano per importanza quelle di Roma, Ancona, Ravenna, Orvieto, Viterbo, Perugia, Spoleto e Terracina. In età controriformistica una legislazione sempre più restrittiva, inaugurata durante il pontificato di Paolo IV con la bolla Cum nimis absurdum e culminata con Hebraeorum gens, spinse molti ebrei a emigrare. Durante il pontificato di Sisto V, caratterizzato da una relativa tolleranza religiosa, quattromila o cinquemila ebrei fecero ritorno nello Stato Pontificio a seguito della promulgazione della bolla Christiana pietas (1586)[37]. Ma il ripristino di una legislazione antiebraica voluta da Papa Clemente VIII con la bolla Caeca et obdurata ebbe effetti devastanti per tutti i sudditi di religione ebraica. Molte comunità sparirono (fra cui quelle di Terracina, Spoleto e Viterbo), altre si ridussero a poche decine di unità (Perugia e Ravenna). Solo a Roma (e, in minor misura, ad Ancona), sopravvisse un nucleo ebraico di una certa consistenza. Gli ebrei romani, relegati nel ghetto, dovettero tuttavia attendere l'età napoleonica per vedere riconosciuti i propri diritti che con la Restaurazione tornarono ad essere conculcati. Durante la Repubblica romana si produsse una nuova emancipazione, che subì forti limitazioni dopo il 1849 ad opera di Pio IX, che pure agli inizi del suo pontificato aveva mostrato una certa tolleranza nei confronti dei propri sudditi israeliti. Con l'annessione dello Stato Pontificio al Regno d'Italia (1870) gli ebrei tornarono nuovamente a godere di pieni diritti civili.

Lingue dello Stato Pontificio

Idioma ufficiale dello Stato Pontificio era il latino, in cui venivano redatte le pubblicazioni ufficiali e istituzionali, ma non parlata usulamente nello Stato. Il latino fu anche molto utilizzato come lingua veicolare dalle gerarchie ecclesiastiche in epoca medievale, per essere in età moderna gradualmente sostituito dall'italiano. In italiano veniva impartita l'istruzione elementare, che era obbligatoria e gratuita per tutti i bambini dello Stato. La popolazione, tuttavia, parlava abitualmente dialetti locali: il romanesco, il ciociaro, il sabino, i dialetti dei Castelli Romani, i dialetti umbri (perugino, altotiberino, ecc.), i dialetti marchigiani, il romagnolo. Vi erano inoltre delle minoranze parlanti dialetti campani a Benevento (dialetto beneventano) e Pontecorvo (ancor oggi compresa nell'area linguistica meridionale). Ad Avignone, città pontificia per quasi cinque secoli, la lingua più diffusa fra le classi popolari e la borghesia minuta era una varietà dell'occitano, il provenzale mentre nell'aristocrazia, nell'alta borghesia e fra gli uomini di cultura era frequente il bilinguismo (francese e provenzale) e, nel caso di cittadini legati alla Curia, anche il trilinguismo (provenzale, francese e italiano).

Cronologia dei «Papi re»

Elenco dei papi che hanno governato lo Stato. Il numero indica il loro ordine all'interno dell'elenco cronologico generale di tutti i papi.

Note

  1. ^ Il Regno di Napoli fu legato da vincoli di vassallaggio allo Stato della Chiesa fino al 1776, allorquando Ferdinando IV ordinò di non pagare più al Papa la chinea, tributo simbolico che aveva la funzione di riaffermare esplicitamente tali legami. Il Regno di Napoli tuttavia, al pari di altre entità statuali unite al Papato da rapporti vassallatici, fu sempre un organismo dotato, sotto il profilo giuridico, di piena sovranità (anche se spesso unito dinasticamente ad altri stati europei)
  2. ^ Dal 1179, allorquando Alessandro III, su sollecitazione di Alfonso I del Portogallo, riconosce l'indipendenza del Paese dal Regno di León e lo pone, come Stato vassallo, sotto la protezione della Santa Sede mediante la bolla Manifestus probatum
  3. ^ All'epoca il Lazio si estendeva a meridione fino alla città di Terracina, ultima roccaforte pontificia. Il circondario di Cittaducale, il circondario di Sora e il circondario di Gaeta con le Isole ponziane, facevano infatti parte del Regno delle Due Sicilie ed erano già stati annessi nel 1860, quando il Regno d'Italia si chiamava ancora Regno di Sardegna
  4. ^ Andrea Gardi, op. cit., pag. 23.
  5. ^ Andrea Gardi, Lo stato in provincia. L'amministrazione della legazione di Bologna durante il regno di Sisto V (1585-1590), Bologna, Istituto per la Storia di Bologna, 1994 (Studi e ricerche 2), p. 21
  6. ^ Girolamo Arnaldi, Le Origini dello Stato della Chiesa, Torino, UTET Libreria, 1987, p. 28. ISBN 88-7750-141-3
  7. ^ «Con l'istituzione del ducato di Roma...cominciava a profilarsi una nuova antitesi fra una romanità, a un tempo ecclesiastica e civile, incarnata pressoché esclusivamente dal clero locale e dal [vescovo dell'Urbe], e una romanità militare, di frontiera, incarnata dal duca bizantino...» di Girolamo Arnaldi, Le Origini dello Stato della Chiesa, Torino, UTET Libreria, 1987 p. 28, ISBN 88-7750-141-3
  8. ^ Pipino non poté partecipare personalmente alla guerra, poiché il suo casato e quello del re longobardo erano imparentati.
  9. ^ Fu in quell'occasione che, per giustificare la cessione forse dubbia anche agli occhi dei diretti interessati, venne verosimilmente falsificato il documento della Donatio Constantini.
  10. ^ Ravegnani 2004, op. cit., p. 138.
  11. ^ Questa clausola fa forse riferimento ad un progetto di Carlo Magno su una mai avvenuta spartizione dell'Italia lungo la trasversale Luni-Monselice.
  12. ^ Marco Rizzi, Cesare e Dio, Il Mulino, 2009, pp. 133-36.
  13. ^ Oltre a ciò, i papi addussero come motivazione della propria superiorità nei confronti dell'autorità imperiale anche la donazione di Costantino, un presunto atto mediante il quale l'imperatore romano avrebbe donato l'intera parte occidentale dell'Impero alla Chiesa. L'Europa occidentale, quindi, sarebbe dovuta essere sottoposta al potere del papato. Il documento, tuttavia, nel Rinascimento, fu riconosciuto definitivamente come falso.[senza fonte]
  14. ^ Il governo tramite rettore era abituale nelle altre provincie dello Stato della Chiesa già dal tempo di Innocenzo III.
  15. ^ Per favorirne il viaggio, gli spedì dei denari tramite i banchieri di Firenze e Pistoia. I denari, 200.000 fiorini d'oro, gli furono messi a disposizione a Milano.
  16. ^ O "Cattività babilonese" - (1309-1377), così definito in Italia in ricordo della deportazione degli Ebrei a Babilonia.
  17. ^ Pagine cattoliche, Storia - Modernità: L’Italia nel secolo XIV.
  18. ^ A. Gardi, op. cit., pag. 23.
  19. ^ L'attribuzione della sede a Ferentino non è sicura.
  20. ^ La sede cambiò a seconda delle condizioni politiche (rapporti con le famiglie signorili).
  21. ^ Secondo Ruggiero Romano, che generalizza per l'intera Europa dei dati cronologici precedentemente proposti da Carlo Maria Cipolla per la sola Italia, la crisi economica ha inizio negli anni 1619-1622. Entrambi gli autori, e le rispettive posizioni sul tema, sono citati da Guido Quazza, La Decadenza italiana nella Storia europea, Torino, Giulio Einaudi Editore SpA, 1971, p. 59
  22. ^ La sede papale era stata infatti trasferita una prima volta ad Avignone nel 1309
  23. ^ Testo completo del Motu proprio disponibile al sito
  24. ^ Cfr. AA. VV., Storia d'Italia, Torino, Einaudi, 1974, ripubblicata da il Sole 24 Ore, Milano, 2005, vol. 5 (Stuart J. Woolf, L'Illuminismo e il Risorgimento. La Storia politica e sociale) p. 271
  25. ^ «... Gli anni successivi a quelli in cui fallirono i moti rivoluzionari [del 1820-21] sono considerati tradizionalmente come il periodo delle repressioni più severe avvenute in tutta l'età del Risorgimento in tutti gli Stati italiani, eccettuati forse lo Stato della Chiesa e il Regno delle Due Sicilie, dove la dura e ininterrotta repressione governativa rende difficile e superfluo qualsiasi giudizio qualitativo... » Ibidem p. 281
  26. ^ Riccardo Bacchelli gli dedicò alcune pagine ne 'Il mulino del Po
  27. ^ Cf. F. Traniello, Religione cattolica e Stato nazionale. Dal Risorgimento al secondo dopoguerra, Il Mulino, Bologna 2007, p. 87.
  28. ^ a b Cit. in AA. VV., Storia d'Italia, Torino, Einaudi, 1974, ripubblicata da il Sole 24 Ore, Milano, 2005, vol. 21 (Nicola Crepas, Le premesse dell'industrializzazione) p. 169
  29. ^ M. Dincecco, G. Federico & A. Vindigni. Warfare, Taxation, and Political Change: Evidence from the Italian Risorgimento.. URL consultato in data 20 aprile 2012.
  30. ^ Secondo la Storia d'Italia Einaudi, tali riforme risultarono tuttavia tardive e, in molti casi, inefficaci. Cfr Ibidem, p. 169
  31. ^ Progettata nel 1856, entrò in servizio quando i territori interessati erano entrati a far parte del Regno d'Italia.
  32. ^ La tratta Ceprano-Napoli fu realizzata sotto il Regno d'Italia.
  33. ^ a b Andrea Tornielli, Pio IX. L'ultimo Papa re, Milano, il Giornale, 2004.
  34. ^ Convenzione stipulata a Parigi tra il Governo Francese e lo Italiano per la cessazione della occupazione francese in Roma, e per il trasferimento della Metropoli da Torino in altra Città del Regno. Parigi le 15 Septembre 1864.. MantuaLex. URL consultato in data 15 agosto 2010.
  35. ^ Vedi Giornata dell'Aspromonte.
  36. ^ Il concilio fu sospeso in seguito alla presa di Roma e non fu più riconvocato Non fu ufficialmente chiuso se non nel 1960 da papa Giovanni XXIII, come formalità prima dell'apertura del Concilio Vaticano II.
  37. ^ Cfr. Attilio Milano, Storia degli Ebrei in Italia, Torino, Einaudi, 1992, p. 258, ISBN 88-06-128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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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ovanni Tabacco. Storia d'Italia, vol. 1, Dal tramonto dell'impero fino alle prime formazioni di Stati regionali. Torino, Einaudi, 1974
  • Gabriella Santoncini, Ordine pubblico e polizia nella crisi dello Stato Pontificio (1848- 1850). Milano: Giuffre, 1981
  • Piero Zama, La Rivolta in Romagna fra il 1831 e il 1845. Faenza: Fratelli Lega, 1978.
  • Elvio Ciferri, Papal States in «Encyclopedia of the French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Santa Barbara (California), ABC Clio, 2006
  • Atti del Convegno «La Legazione di Romagna e i suoi archivi: secoli XVI-XVIII», pubblicati a cura di Angelo Turchini. - Cesena: Il ponte vecchio, stampa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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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 L'ALLEANZA, LA COOPERAZIONE, L'AMICIZIA E LA COLLABORAZIONE TRA' LA REPUBBLICA ITALIANA E LA REPUBBLICA POPOLARE CINESE!!!